저는 충청도 촌놈입니다. 차령산맥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가다 서해 바다를 만나 우뚝 멈춰버린 곳 보령, 그 중에서도 보령탄광이 있는 성주 산골 촌놈입니다. 아버지가 보령탄광촌에서 광부로 일하시던 중 갱내에서 발파하다 매몰되는 사고를 당해 다치셨고 그 바람에 어린 시절을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저도 구두쇠 소릴 듣지만 저에 비하면 저희 아버지는 자린고비도 울고 갈 정도로 말도 못하는 구두쇠였습니다. 그로 인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 갈 때니까 지금부터 33년 전 일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코가 안 좋아 축농증을 몹시 앓았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고 아버지를 졸라 축농증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다니면서 군에 입대하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축농증 수술한 게 재발했다고 군의관이 ‘4급 보충역’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쪽팔려서’ 현역 가야겠다고 떼를 썼더니 그 군의관이
“남들은 일부러 보충역으로 빼려고 하는데 잠자코 있어 임마.”
라고 하며 또 제 뒤통수를 한 대 탁~ 때리더군요.
저는 하는 수 없이 보충역 판정을 받고 방위소집영장이 나오기만 기다렸는데, 당시에 입대하려는 사람이 밀려 있다고 나오랄 때는 안 나오다 대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보기 직전에 소집영장이 나왔습니다.
‘하필 대학교 축제를 코앞에 두고 소집영장이라니... 마침 사귄지 얼마 안 되는 여자친구는 어쩌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시골 촌놈이라 특별한 빽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조치원에 있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하기로 했습니다.
대학교에서 학보사 선후배들과 ‘입영전야’ 행사를 거하게 마치고 신병훈련소 가기 전날 집에 내려와 하루 밤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께 훈련소에 간다고 말씀드리고 큰 절을 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먼 길(?) 떠나는 아들에게 무언가를 내미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훈련소에서 맛있는 것 많이 사 먹으라고 용돈이라도 두둑이 주시려나?’ 하고 생각하며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아니, 이게 런닝구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밤톨만한 구멍이 숭숭 뚫린 다 헤진 런닝구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어 달 전 집에 왔다가 아버지가 입고 계셨던 것을 본 적이 있던 그 런닝구였습니다. 런닝구는 앞뒤에 크고 작은 구멍이 잔뜩 나 있고 누렇게 색깔까지 바래어 이제는 걸레를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제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아~ 런닝구가 그게 뭐예유, 다 헤진 걸 입구... 새것 없시유?”
하고 여쭈었더니 아버지는
“집에만 있는디 뭐가 워뗘서, 걸레 할라문 안즉 멀었다.”
하고 대답하셨던 바로 그 런닝구였던 것입니다.
제가 잠시 할 말을 잊고 서 있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요.
“언능 갈아입고 가라.”
저는 깜짝 놀라
“아부지, 아, 쪽팔리게 이걸 어치케 입어유?”
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아, 그래도 장남이 군댈 가는디 남들 헌티 야 면도 있는디 그냥 가게 놔둬유.”
어머니도 옆에서 보고 계시다가 구두쇠 아버지가 너무했다 싶었는지 한 말씀 거드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점잖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훈련소 가믄 사제 옷은 다 벗고 훈련소에서 주는 옷만 입어야 헌다. 너는 텔레비도 못봤냐? 훈련소 간 아들 옷이랑 신발까지 죄다 박스에 싸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 그거 보면서 엄마가 울고 그러는거 있잖냐.”
즉, 아버지 말씀은 훈련소 가면 어차피 속옷부터 군복이며, 군화까지 모두 새로 지급해 줄 텐데 굳이 뭐 하러 새 런닝구 입고 가서 집으로 싸서 보내게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딴엔 그렇겠다 싶어 아버지의 헤진 런닝구로 갈아 입고 조치원 신병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그런데 신병훈련소에 들어와 보니 생각과는 영판 틀리지 말입니다. 내무반에 도착해서 옷이라고 주는 것은 달랑 가슴에 숫자가 새겨진 훈련복 한 벌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설마 이것이 다는 아니것지? 속옷은 나중에 줄라능가벼?’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우선은 급한 대로 누가 볼까 싶어 겉에 입고 간 긴팔 티 위에 훈련복을 입고 하루 종일 훈련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돌아와 내무반 앞에 집합한 우리 소대원들에게 소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한다. 날씨도 더우니 모두 내무반에 들어가 상의는 탈의하고 식기 들고 4열종대로 집합한다. 알겠나?”
‘아이쿠, 죽었구나.’
저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배가 아파서 밥을 안 먹는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긴팔 티라도 입고 나갈까?’ ‘아니야. 긴팔 티는 울긋불긋한 원색이라 금방 표시가 날텐데’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면서도 ‘에이, 내의는 왜 빨리 안줘서 사람 망신살 뻗치게 만들어’ 하며 신병훈련소의 느려터진 행정을 원망했습니다.
제가 내무반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밖에서는 벌써 다들 모였는지 인원 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번호”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열하나, 열둘, 번호 끝.”
“야, 야, 거기 뭐야? 한 놈이 빠졌잖아. 한 놈 어디 갔어?”
소대장의 호령에 다들 두리번거리며, 없어진 놈이 누군지 찾고 있었지요.
저는 안되겠다 싶어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는 심정으로 훈련복 상의와 긴팔 티를 벗고 런닝구만 입은 채 식기를 챙겨들고 뛰어 나갔지요. 그리고는 모르는 척 잽싸게 열의 맨 뒤 끝에 섰습니다.
그 때 제가 나오는 모습을 본 같은 소대 동기 녀석들은 킥킥거리며 웃었지 말입니다.
누렇게 바랜 런닝구에 온 통 구멍 뻥뻥 뚫려 있으니 안 그렇겠습니까.
소대장도 별놈 다 봤다는 듯 씩 웃더니 늦으면 먹을 게 없다며 우리 소대를 곧 바로 식당으로 인솔했습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우리는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며 식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식당 쪽을 향해 가로로 길게 서다보니 맨 가에 있던 우리 줄이 가로로 맨 앞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어쩐대유.’
소대장이 일찍 서둘러 도착해서 인지 식당은 이제 막 배식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배식 준비가 완료되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 우리는 오른손은 식판을 잡고 왼쪽 손은 허리에 대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열심히 군가를 배웠지요.
“얼싸좋다 훈련병 신나는 어깨춤, 우리는 한 가족 팔도사나이”
이렇게 한참을 군가 부르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의 움직임이 부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군대 짬밥을 담당하는 군수선임하사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지시를 하기도 하고, 소대장들도 자기 소대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만치서 말똥을 두 개나 단 훈련소장님이 교관들을 이끌고 식당에 나타나셨습니다. 훈련병들이 입소 첫날 식사는 잘 하는지 점검하러 오신 거지요. 맨 앞줄 우측 끝에 서 있던 저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훈련소장님은 식당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열을 맞춰 서 있는 우리를 쭉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절대 나만 보지 말고 지나가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 바램과는 달리 훈련소장님은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그때 먼저 나를 발견한 교관들 사이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교관들도 어쩌지 못하는 사이에 훈련소장이 제 앞까지 다가 왔습니다.
누렇게 바래 구멍이 뚫린 누더기 런닝구를 입고 있는 저를 한참 동안 위 아래로 훑어보던 훈련소장님은 지휘봉으로 제 배를 쿡쿡 쑤시며 말했습니다.
“너는 따발총 맞았나?”
그 순간 주변에서는 쿡쿡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 말입니다.
저는 잔뜩 얼어서
“훈병 최・병・선, 아닙니다.”
“그럼, 이건 왜 그런건가?”
“네, 저희 아버지가 훈련소 가면 군복이랑 내의도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떨어진 것 입고 왔나?”
“네, 그렇습니다.”
저는 창피하지만 그래도 내의를 늦게 줘서 망신을 준 훈련소장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물었지 말입니다.
“그런데 내의는 언제 주십니까?”
그러자 훈련소장님이 기가 막히다는 듯 웃더니
“방위병은 내의 안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교관이랑 훈련병들이 갑자기 웃기 시작 했습니다.
저는 그만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똑같이 군대를 가고 훈련소에 입소를 했으니 군인에게는 당연히 국가에서 군복과 군화는 물론 내의도 지급해주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방위병은 집에서 출퇴근 한다고 내의는 안준다는 겁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같은 군인끼리 차별을 하다니....
그때 훈련소장님이
“그럼 가져온 내의가 하나도 없나?”
이렇게 묻자, 저는 큰소리로
“네, 그렇습니다.”
라고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제 아버지가 어차피 도로 보낼 것 뭐 하러 가져 가냐고 해서 맨몸으로 왔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신병훈련소 들어올 때도 ‘신병훈련소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군화도 주고, 거기에다 담배며 건빵 같은 간식도 주는데 돈 쓸 일이 뭐가 있냐’는 아버지 말씀을 철썩 같이 믿고 차비만 달랑 갖고 왔기에 사실 내의 살 돈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4주 간 구멍 난 런닝구 하나로 버틸 일이 까마득했답니다.
그런 제 사정을 간파했는지 훈련소장님이 군수보급관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저 한테 내의 두벌을 지급하라고 지시 답니다.
그날 밤, 저녁밥을 먹고 내무반에 있는데 행정실에서 호출하기에 가봤더니 내의 두벌을 챙겨 주더군요. 그래서 훈련소 있는 동안 번갈아 빨아 입으며 잘 지내고 왔습니다.
그 뒤로 신병훈련소 퇴소하는 날까지 제 별명은 ‘따발총’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병훈련소를 퇴소해서 집에 돌아온 저는 맨 먼저 아버지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창피 당하게 만든 걸 따져야 할 것 같아서였지요.
저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볼 멘 소리로
“아버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련소가면 옷도 다 준다고 그래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점잖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군대 갈 땐 방위병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군인은 다 같은 군인인줄 아셨다는 겁니다.
암튼 구두쇠 아버지 때문에 조치원 신병훈련소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지만 이제 돌이켜 보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탄광촌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5남매 모두 잘 키워내신 것은 그렇게 악착같이 절약하고 저축하신 아버지의 구두쇠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저는 요즘 사람 같지 않게 4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들어가는 돈이 많아 자연스럽게 구두쇠가 되었지요.
탄광생활을 오래 하신 탓에 아버지는 오랜 기간 병원에서 투병하시다 12년 전 진폐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아버지 기일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지금 제가 제 아이들에게 구두쇠, 짠돌이 소리를 듣는 것은 다 아버지에게서 대물림된 절약정신 탓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구두쇠 소리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시고 가르쳐 주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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