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나라 일기장/한 줄 일기장

이근순 자서전

통일왕새우 2018. 6. 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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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제치하인 1938년 10월 26일(음력) 인천시 장수동 만의골 은행나무 바로 앞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삼천, 어머니 한돌순 사이에 1남3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오빠, 아래로 여동생 사이에 끼인 몸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오죽하면 12살때 6.25 전쟁이 터져 마을 앞 초가집이 폭격으로 날아가자 아버지는 급히 오빠 손을 잡아 끌고 피난을 떠나려고 했다. 방안에 나를 그냥 놔둔 채.
그러자 오빠가 '동생은 왜 안데리고 가느냐'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매달리자 겨우 나를 데리고 피난을 갔다. 그리고 여자는 공부를 할 필요없다고 유독 나만 학교를 보내지 않아 나는 평생 '까막눈'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15살에 외가쪽 친척 아저씨가 군인 장교로 있는 집에 식모로 보내졌다. 집안에 입을 하나라도 덜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그후 아버지의 소개로 이북에서 홀로 내려 왔다는 사람을 만나 얼굴 한번 보고는 바로 은행나무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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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고 공부도 많이 한 신랑은 혼자 이북에서 내려온 처지라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돈 벌러 간다며 강원도 탄광촌으로 간 후 몇 달씩 소식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신랑이 도망갔다고 소근댔고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만삭의 몸을 이끌고 물어물어 강원도 함백으로 신랑을 찾아갔다. 송아지만한 노루가 껑충껑충 뛰어 다니던 산골에 허름한 거적을 덮고 살아도 신랑하고 있으니 좋았다.


그렇게 함백, 사북, 영월 등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두딸과 아들 하나를 낳고 충남 보령 탄광으로 이사하여 다시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아 모두 5남매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해 남편이 탄광에서 발파사고로 갱속에  매몰되었다가 구조되었지만 6개월 넘게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해서도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졸지에 다섯 아이들과 병든 남편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 되었다. 장날 대천읍내에 나가 생선 등 갖가지 물건을 받아 광주리에 이고 산골짜기에 있는 탄광촌 마을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후에는 탄광촌에서 하숙과 밥장사를 하며 5남매를 모두 키워냈다.​


남편은 똑똑하고 꼼꼼하여 가계부를 적고 적금을 들어 가정을 경제적 빈곤에서 탈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8년 폐광이 되어 탄광촌을 떠나 내 고향인 인천으로 이사할때 근사한 집 한 채를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비록 내이름 석자를 겨우 쓸 정도의 까막눈이지만 남에게 나쁜짓 하지 않고 나의 노력으로 이만큼 살게되었으니 이 또한 내 복이라 생각한다. 남편을 진폐증으로 먼저 떠나보냈지만 아직도 첫선을 보던 날 훤칠하고 멋있던 남편이 눈에 아른 거린다.